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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력으로 일구어 낸 동아시아의 근대화, 일본의 메이지 유신.


1. 에도막부 말기 전후의 일본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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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막부 말기 (이하 막말) 이라고 칭하는 시기는 후술할 쿠로후네 사건이 일어난 1853년부터 대정봉환으로 에도 막부가 멸망했던 1853년까지 총 15년의 시기를 막말이라고 칭하는데 이 시기 전체적으로 넓은 의미의 메이지유신이라고 볼수 있다.

 

에도막부 역시 조선과 마찬가지로 대외정책은 쇄국정책으로 일관하며 서양의 선진문물에 대해 두려워 하고 있었다고 한다. 에도막부는 원래 막부 초창기부터 쇄국정책이였지만 종전보다 강화했었던 것. 조선보다는 세계 정세가 빨랐던 막부는 개항을 하게되면 막부를 유지할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기도 했다.



2. 메이지 유신의 시발점, 쿠로후네 사건(흑선내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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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페리제독은 동아시아 원정을 하게되는데 타겟은 일본과 류큐왕국(현재의 오키나와). 목적은 강제개항이었다. 후일 일본은 이 사건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조선에게 운요호 사건을 일으키게 되는 개항을 하게되는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갑자기 미국의 흑선 4척이 몰려와서 개항하라고 협박하자,  겁에 질린 에도 막부는 1년의 생각할 시간을 갖게 해달라고 애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후 페리제독은 처음 일본에 침입했던 4척보다 많은 9척의 흑선을 이끌고 개항하라고 협박하자, 일본은 무력으로 충돌하면 도저히 이길수 없다고 판단하고 개항을 선택하게 되었다.

 

사실 막부 내부의 사정이 복잡했는데 당시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적통 후계자 없이 죽자, 후계자를 두고 내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혼잡한 상황에서 먼저 내부의 문제해결에 집중하기 위해서 외부의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별다른 저항 없이 일본은 막부 내내 유지하던 쇄국정책을 철회하고 개항하게 되었다.

 

그리고 개항의 결과로 일본은 미국과 미일화친조약을 맺게 되었다.

 


3. 미일화친조약, "가나가와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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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후네 사건으로 인해 일본은 우리나라의 강화도조약격인 미일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 을 1854년에 맺게 된다. 이 조약은 일본사에서도 매우 비중있는 부분으로 주목받는데 이것 역시 강화도 조약과 비슷하게 일본이 외세와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기 때문이다.


사실 가나가와 조약은 강화도 조약과는 다르게 막부 입장에선 꽤 수용할만한 조약이었다고 한다. 조약에선 시모다는 즉시 개항, 하코다테는 1년뒤에 개항을 하도록 명시되어있다. 이후 미국은 일본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다시 재체결했고 이 조약은 매우 불평등한 조약으로 알려져 있다.

 

중요한건 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고메이 덴노(천황)의 칙허를 받지않고 막부 멋대로 체결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불평등 조약 체결과 막부의 행보로 인해 외부적으로 조선에게 운요호 사건이라는 사건을 야기했고, 내부적으론 존왕양이의 막부타도 운동이 시작되었고 본격적인 메이지 유신의 시작을 알리는 기폭제같은 영향을 줬다.

 

 

4. 존왕양이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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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사실 강제 개항한 뒤로는 외세를 이용해 또 다른 외세를 배격하려는 돌려막기식 정치를 했지만 일본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 체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존왕양이파라는 세력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존왕양이는 말 그대로 임금을 지키고, 오랑캐를 물리친다. 라는 말이지만 후술할 사건들로인해 이들은 오랑캐로 생각했던 서구와 손을 잡고 양이라는 기존 입장을 철회하게 되었다.

 

얘네들은 사실 뭐 천황의 이름을 팔아서 막부를 타도하려는 세력이였다.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되려고 했던 것일까?, 아무튼 천황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멋대로 체결한 막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존왕양이파는 막부의 정치적 헤게모니에 큰 의문을 품고있어서, 막부를 타도하고 새로운 세상을 창건해야한다는, 뭐 이런 논리로 이들은 힘을 합쳤다. 


고메이 덴노는 존왕양이 중에 하나인 미토 번에 「무오의 비밀칙서」를 내렸고 일본의 정치체계상 천황이 다이묘에게 직접 정치적인 권한을 행사한적이 없기 때문에 막부의 실권자 이이 나오스케는 이 일련의 사건에 대해 크게 분노하여 존왕양이파에 대해 대대적인 숙청을 하게되었다고 한다.

 

바로 "안세이 대옥" 이라는 사건으로 칭하는 이 숙청으로인해 반대파들의 막부에 대한 반발심은 매우 커지게 되어 극단주의 노선을 걷게 된다. 후일 존왕양이로 일컫어지는 여러 번들은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사카모토 료마에 의해 하나로 합쳐졌고 메이지 유신은 돌이킬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게 된다.

 


5. 나마무기 사건과 사쓰에이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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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들의 연합한 형태인 존왕양이파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어느날 존왕양이파의 유력자 사쓰마번의 번주의 아버지 시마즈 히사미츠의 행렬이 있었는데 영국인 상인들이 말에서 내려 예의를 갖추지 않자 사무라이들이 무례하다면서 이 영국인 상인들을 1명을 베어 죽이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힌 사건이 있었다.

 

이게 바로 나마무기 사건. 당시 영국은 세계 최강대국이였는데 영국인에게 손댄 얘네들은 정말 간댕이가 부은 짓거리였다고 볼 수 있었다. 영국은 나마무기 사건을 계기로 바로 전쟁을 일으켰는데 이 전쟁을 사쓰에이 전쟁이라고 한다.

 

존왕양이로 대두되는 이 번들은 꾸준히 전력을 증강시켰는데, 당대 세계최강으로 알려져있는 영국 해군이 사쓰마 번의 맹렬한 저항으로 인해 요코하마로 퇴각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사건에 대해 뉴욕타임즈에 일본이 의외로 서구식 무기와 전술에 익숙하여 만만하게 보지말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는 재밌는 사실. 일본 정도는 손가락으로 이길거라 생각했던 영국 해군은 의외의 전력을 갖고있던 사쓰마 번을 높게 평가했는데 이를 계기로 존왕양이파들은 서구 오랑캐를 물리친다라는 기존 입장을 철회하고 영국과 손을 잡았고 유신파를 견제하기 위해 막부는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를 끌여들여 저항했는데 영국 또한 친막부 성향의 프랑스를 견제하기위해 사쓰마 번과 손을잡고 조약을 체결하고 직접 무역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유신파들은 막부와 직접적인 대립을 할수있는 힘을 얻은것.

 


6. 역사의 시작, 시모노세키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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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쓰에이 전쟁 이후 양이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조슈 번이 시모노세키 해협을 봉쇄하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상선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했었다. 조슈 번은 존왕양이파들중에서도 천황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에 있던 번이였는데 사쓰마번이 양이를 버리고 영국과 손잡은것과 반대격으로 양이운동에 중심에 섰다고 한다. 그 때문에 유럽상선들을 공격한 것이다. 이로인해 1863년부터 1864년 까지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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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해협, 이곳에서 조슈번은 유럽상선들을 공격했다.)

 

친막부성향의 프랑스군을 포함해서 막부시절에도 교역하던 네덜란드까지 조슈 번은 유럽 상선을 향해 무차별 공격을 했다고 한다. 이로인해 미군은 즉각 보복을 결의하고 요코하마에 있던 전함 USS 와이오밍호를 시모노세키 해협에 급파했다.

 

와이오밍호는 혼자서 조슈번의 전함 4척을 침몰시키고 시모노세키 해협 일대를 쑥대밭을 만들고 갔다. 사흘 후 프랑스 역시 공격을 당했기때문에 프랑스 역시 전함 2척을 시모노세키 해협으로 보내서 해안선 일대를 전부 쓸어버리고 해병대를 상륙시켜 일정 시간 점거하기도 했다. 근데 조슈 번은 프랑스군이 물러가자마자 다시 포대를 만들어서 해안선을 봉쇄했다.

 

이런 상황에서 앞서 말했던 사쓰마번은 영국과의 교역을 통해 양질의 무기를 공급받아서 상당히 전력이 상승했는데 이 전력을 바탕으로 교토(당시 막부 수도)에서 조슈 번 일파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거기다가 조슈번 영지에서도 일부 봉기가 일어나서 내부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지만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양이를 철회하지 않았다. 영국은 조슈번을 제대로 혼내줘야겠다는 계획을 갖고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연합군을 결성 총 전함 17척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구성해서 시모노세키 해협으로 보냈고 조슈번은 전쟁을 시작하여 8일간의 전쟁을 했고  조슈번이 프랑스군이 떠난후 만들어놓은 해안선 포대가 모두 파괴되고 조슈번의 패배로 전쟁은 마무리가 되었다.

 

조슈번은 상선들을 공격하고 전쟁을 야기시켰다는 죄목으로 총 300만 달러를 연합국측에 배상하게 되었는데 (시모노세키 조약) 이런 천문학적인 돈을 갖고있을리가 없는 조슈번은 막부가 시켜서 한짓이라고 구라를 쳤고 이로인해 막부가 배상금을 대신 갚아주는 상황이 되었다. 


이후 조슈번은 서양이랑 전쟁을 치러보니 서양의 힘이 매우 쌔다는걸 실감하게 되었고 뒤늦게 양이정책을 철회하고 사쓰마번과 같이 서양과 협력해야한다는 노선으로 바꾸게된 계기가 바로 시모노세키 전쟁이라고 한다.

 

이후 전쟁에서 탈탈 털린 조슈번은 끊임없이 막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는데 그 유명한 사카모토 료마에 의한 사쓰마번과의 연합인  "삿초동맹(1866)" 이 결성되었고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연합하여 에도막부를 멸망시키게 되었다. 이 모든일이 100년 조금 넘은 일이라니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7. 에도막부의 멸망 "대정봉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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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막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더이상 막부를 지탱할 힘이 없다고 판단했고, 또한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연합하여 막부를 타도하겠다고 하자 더 이상 버티지 않고 실권을 메이지 천황한테 넘기게 되었고 천황은 이를 칙허 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로 성립된 에도막부는 막을 내리게 된 사건이 바로 "대정봉환" 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군사권에 대해선만은 손에 놓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평화적으로 시작할수 있었던 메이지유신이지만 사쓰마와 조슈는 기다리지 않고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복고를 결의했다. 그로인해 벌어진 전쟁이 보신전쟁(무진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막부 및 잔재세력은 대부분 정리되었고 근대의 일본이 시작된 계기라 할수있다.

 

 

8. 근대 일본의 시작, 보신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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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도쿠가와 가문이 실권을 천황에게 넘김으로써 에도막부는 종지부를 찍었고 메이지 정권은 시작되었다고 봐도 되지만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완전한 권한 이전을 요구했던 유신파 입장에서 군사 지휘권을 놓지않은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행보를 봤을때 유신파는 다들 빡칠수밖에 없었다. 누가보더라도 요시노부가 군사권을 놓지않은건 아주 음흉한 행보가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 많은 막부군을 지휘하면서 언제 배신을 하는 상황을 만들지 모르는 요시노부에게, 유신파는 더이상 기다리지 않겠다고 결정하여 무력으로 쿠데타를 감행했고 이에 유신파는 막부군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이게 바로 보신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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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신전쟁을 계기로 주류 막부파, 막부군은 항복하여 완전히 해산되었다. 보신전쟁은 진정한 메이지의 시작을 알린 전쟁이라 볼 수 있겠다.

 

 

 

 

 

 

 

 

9. 폐도령과 서남전쟁(세이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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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부 주류파를 이긴 유신파는 메이지 정권을 이뤄냈고 이후 내부 논의가 이뤄진건 조선 정벌에 관한 문제였다(이하 정한론). 조선 정벌에 대해 유신정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와중에 공표된게 바로 폐도령이다. 사무라이의 나라인 일본에서 칼을 차고 다니지 말라니 무사들은 매우 반발이 심했다고 한다. 사실 신시대가 열리면 무사들은 신정부의 정부군이 될것으로 여겼지만 국민개병제가 실시되어 무사들을 제외하고 농민이나 평민들로 구성된 새로운 정부군을 편성했다는 것이다. 무사들 입장에선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메이지를 이뤄낸건 결국 번의 무사들이였지만 일본이 원한건 일본도를 들고 백병전을 하는 구식 전투방식이 아니라 서구식 전투방식을 원했고 무사들은 사실 새로운 서구식 전쟁방식에선 쓸모가 없었다고 판단을 내린 것. 열도 각지에서 무사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중에서 메이지를 이뤘던 주역 사쓰마번의 반란이 매우 극렬했는데  신정부가 무사들의 특권을 하나, 둘씩 없애는것도 모자라 칼도 못차게 하고 다닌것이 거의 결정적인 반란의 계기라고 볼 수 있겠다.

 

신식 전투방식으로 싸웠던 정부군이 재래식 전투방식으로 싸웠던 반란군을 충분히 쉽게 제압할거라 예상되겠지만 의외로 일본도를 뽑고 돌격하는 반란군의 공세에 정부군은 상당히 고전을 했다고 한다.

 

시로야마 전투에서 반란군들은 패배를 직감하자 다들 할복했고 전쟁은 일단락 되었다. 이 전쟁은 톰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 라는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서남 전쟁을 끝으로 일본은 정식으로 내란이 종식되었고, 정한론에 충실히 의거해서 조선 침략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일본만이 근대화에 성공했고 조선은 실패했는가?

 

이것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을수 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일단 첫번째로 일본은 선택이 빨랐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질질 끌려다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비교적 빨리

 서구식 문물을 따라야 된다는 생각이 있었다. 네달란드와 꾸준히 교류했던 막부의 영향도 어느정도 있을 수 있고 두번째로 사쓰마번과 조슈번은 서로 협력하여 메이지유신을 이뤄냈지만 조선은 끝까지 화합이 되지 않았단 것이다.

 

고종은 이 엄청난 시대의 소용돌이에서 우물쭈물 시간만 허비했고 민비는 외세에 의존만 하려했고 민비의 배경을 이용해 득세한 외척세력들은 수탈만 강화했단 것이다. 도저히 개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지 않아보였다.

 

일본은 끊임없이 전력을 증강하고 서구와 교류하고 사쓰시마 전투처럼 의외의 승리를 거둬서 서구에게 좋은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를 하기에 가장 마지막 기회는 아마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때라고 보는데, 하지만 고종은 자신의 전제왕권을 지키기 위해 입헌군주정을 주장하던 독립협회를 강제해산시켰고

 

수많은 개화파들은 안타깝게도 친일파로 돌아서게 되었고 그중 이완용 같은 몇몇은 악질 친일 매국노로 변하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다. 조선도 기회는 많았다. 갑신정변때도 충분히 개화를 할수 있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