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흑사병, 1/3 유럽인구를 죽인 흑사병이 지난 후에 모습과 결과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1/3이 줄어들 정도로 엄청난 전염병이었다. 하지만, 흑사병은 1350년 말을 기점으로 돌연 그 기세가 줄어 들게 되는데 이 때 생존한 노동자, 농민들은 인력 부족으로 임금이 엄청나게 올라버리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런 노동력 감소는 지배계층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1/3 유럽인구를 죽인 흑사병, 흑사병이 지나간 후에 모습과 결과

 

 

1. 흑사병의 상황

그런데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인구의 급격한 감소로 곡물의 수요도 감소했고, 땅으로 수입을 올리던 지주들은 높은 임금과 수입 하락의 이중고를 겪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상업과 교역은 마비되었고 무언가를 만들어 줄 숙련된 장인들도 흑사병으로 죽어 없어졌다.

생필품 같은 것들도 생산량이 소요를 따라가지 못해 가격이 폭등했고 이런 현상은 지배 계층이나 농민, 일반 시민들에게 모두 큰 타격을 주었던 것은 당연했다.

 

2. 흑사병 그 후폭풍

 

이후에 이 어려움은 지주에서 농민에게로 전가되었는데, 각종 봉건 조세와 부과금 등으로 부담을 줄이려고 한 것이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흑사병이 잠잠해진 유럽 각지에선 농민 반란이 수도 없이 일어나게 되었다. 가뜩이나 흑사병을 이겨낸 후에도 생활고로 이중고를 겪게 만드니 농민 반란은 예상된 것이었다.

 

또한 흑사병은 교육과 학문, 예술 등의 분야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교육 쪽에선 특히 대학의 피해가 컸다고 한다. 수업을 가르칠 교수들이 죽어 없어졌으며 수업을 들을 학생들 또한 엄청나게 감소했으니깐 말이다. 이 때 유럽의 많은 대학들이 폐교를 면치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술 쪽에선 '죽음'이 자주 쓰이는 소재가 되었다. 이는, 살아 남은 예술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을 덮쳤던 죽음에 대한 공포가 너무나도 인상깊게 각인되었던 것을 보여준다.

 

3. 흑사병으로 인한 예술계의 영향

 

흑사병으로 인해 예술가들은 창작 활동을 위한 여행을 금지당했다고 하니 그들이 표현할 가장 큰, 인상 깊은 기억이나 주제는 흑사병과 죽음뿐이었다. 해골과 시체가 등장하는 그 유명한 '죽음의 무도'라는 장르가 인기를 얻은 때도 바로 이 시기라고 한다. 또한 중세 시대의 큰 축을 담당하고 있던 교회는 흑사병이 한참 창궐했을 당시 신도들에 대한 구제, 즉 전염병 앞에서 그들의 믿음에 대해 보답하지 못했다고 하여 신뢰가 많이 추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중세 시대를 상징하는 종교와 봉건 영주의 전통과 권위에 대한 신뢰 상실로 중세 시대는 끝을 고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흑사병은 유럽의 역사를 바꾼 대격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이미지

 

그렇게 어두운 시기가 지나고 유럽엔 문화, 예술이 꽃피던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르네상스'는 재생, 부흥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라고 한다. 문화의 이중적인 발전 역사를 보여 줄 수 있는 재밌는 부분이다.